택시를 타고 가는데 운전기사가 현직 대통령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한다. 그는 근래에 수입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대통령 탓으로 몰았다. 물론, 대통령이 경제 침체에 대한 총체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욕설 한도가 듣기 민망했다.

“아저씨,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을 그런 식으로 표현해서 되겠습니까? 난 그래도 그 사람을 뽑았습니다.”

거짓말이지만, 그의 말을 막기위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룸미러로 나를 힐끗 보더니 하는 말이 “그래요? 이제 많이 후회하죠?”라고 하고는 수다가 더 많아지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완전히 봉쇄하기 위해 “아뇨, 나는 후회도 안하고, 그가 또 나오면 또 찍을 겁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잠깐 침묵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미치셨군요?”

차에서 내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운전기사의 말이 시사하는 바가 단순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통령의 권력은 피라미드 구조에서 꼭대기에 있으며, 그 행사 여부에 따라 국민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그 최고 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이유가 생기며, 그 견제 권력이 언론이며, 국회이고, 시민단체이며, 사법부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 권력 기구를 최고 권력자가 수중에 넣거나 억압을 하면 견제력이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방향 감각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지난 한국 역사에서 별을 단 군인들이 연달아 대통령이 되면서 견제 권력은 무너지고 흡수되거나, 무참히 억압을 받았다. 지난 세월이 아니라고 해도, 오늘날 역시, 국회는 여당 세력이 있고, 시민 단체는 이념이나 성향으로 편향이 되거나,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사법부는 그 인사권이 최고 권력자에게 있기 때문에 객관성을 지닐 만큼 견제 권력이 못된다.

그래서 가장 객관적인 견제 권력이 언론인데, 그것을 획일화 시키려는 자충수를 두고 있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 그것도 정권 마지막에 왜 그렇게 하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말이지만, 현직 대통령이 많이 힘들었는지 “대통령 노릇 정말 못해먹겠다”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청년 시절에 만났던 어느 목사의 말이 떠올랐다.

그 목사 때문에 나는 목회의 길을 걸을 뻔했다. 별로 깊은 신앙심도 없이 교회에 나간 일이 있는데, 그 교회 목사가 목회실로 나를 부르더니, 추천서를 써줄 테니, 그 교단의 신학대학에 다니라고 했다.

자네같이 소설을 쓰는 사람이 목회를 하면 아주 잘 할 것같고, 소설쓰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깊은 생각없이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때 목사가 어디로부터 전화를 받고 한동안 대화를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어이, 시팔, 정말 목사 노릇 못해먹겠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나 놀랐다.

그 후에 목사 노릇을 못해 먹을 것같아서 신학대학에 안 간 것은 아니지만,(실제는 신앙심이 없었다) 그 목사의 독백을 듣고 실망을 하면서 포기했다. 

성직자는 직업이 아니고 봉사 개념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이 못해먹겠다고 말했을 때 그 목사가 떠오른 것은 아마도 대통령의 직책 역시 성직자만큼이나, 직업 관념으로 볼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민이 뽑아준 이 최고 권력이라는 칼은 잘 쓰면 좋은 요리를 만들어 국민 모두를 행복하게 하지만, 잘못 쓰면 칼에 피를 묻히고 국민을 도탄에 빠지게 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는데, 특히 그의 인간적이고 서민적인 체취를 좋아한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는 인간성이 더러워도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우선이다.

적어도 다시 뽑겠다는 말에 미쳤느냐고 묻는 택시 기사가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진정한 지도자는 그가 또 다시 그 일을 해줬으면 하고 모두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제 대권에 도전하는 후보 중에 그런 사람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과연 가능할지, 권력의 무상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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