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영화에서 낯선 사나이가 지평선 넘어 말을 타고 숲속의 외딴집으로 다가온다. 가족들이 총을 겨누고 낯선 사내에게 신분을 묻는다. 이들은 서로 곧 신분을 밝히고 총을 거두고 아는 사이가 된다.

이처럼 서양 사람들은 낯선 사람끼리 만나면 직접 자기소개를 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반면 한국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제 삼자가 소개하지 않으면 인사하기가 어렵다.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중개자에게 소개를 의뢰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돼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 한국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처럼 직접 찾아가거나 자기를 소개하면 실례가 되고 염치없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유교문화권인 한국인들이 당돌한 행위로 좋지 않은 인상을 주지 않으려는 데서 출발한다.

즉, 서양은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서 보듯이 직결문화인 반면, 한국은 중재문화로 귀결된다.

인생의 가장 소중한 만남에서도 확연히 들러난다. 서양에서는 연예결혼이 많았던 반면 한국의 혼인은 중매가 대부분이었다. 결혼중개업소가 갈수록 번창하는 것 만보더라도 이를 잘 반영한다.

또 민·형사 소송 사건에서 화해율이 미국이 5% 미만인 반면 한국은 이를 훌쩍 넘고 있는 것 역시 중개의식이 강하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이는 재판이 이해관계를 법적으로 가리는 곳이 아니라 재판부에 중재를 기대하는 심리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싸움을 할 때 “나 말리지 마”손바닥에 칩을 뱉고 옷을 걷어붙이고 싸움을 시작한다. 이 말 속에는 곧 누가 중간에 끼어들어 중재를 해 달라는 저의가 내포돼 있음을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에 무속신앙이 번창하고 철학관과 교회가 많은 것도 다 이와 무관하지 않다. 또 고목(古木)과 성황당, 바위 등 중간매개체를 두고 신령과 접한다. 이 역시 신(神)과 중개할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거 상권을 쥐고 있는 객주(客主)와 거간꾼이 존재했다. 현대사회에서도 땅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직접 흥정하기보다는 부동산 중개업소를 끼고, 자동차를 사고 팔 때도 중개자가 필요하며 주식까지 간접상품이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하물며 노사분규를 중재하는 별도의 기구(노동위원회)가 있을 정도로 중계문화와 중개의식이 유난히 발달한 민족이기도 하다.

그랬던 한국의 중재문화가 빛을 잃고 있다. 하이닉스 반도체의 청주공장 증설에도 하청지회 분규가 2년이 넘도록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충북도와 시민사회단체가 중재기구까지 만들었지만 실패했다. 물론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엉킨 문제를 푼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지만 중개문화가 강한 민족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불거진 괴산군과 영동군간의 군(軍)교육기관유치운동에서도 충북도의 중재역할 한계가 여실이 드러난다. 상부 기관의 조정에도 꿈쩍도 않는다. 지자체간의 이해를 조정은커녕 영조차 서지 않고 있다.

이 뿐만 아니다. 각종 주요 국책사업이 환경문제 등으로 표류하는 사업이 부지기수다. 결국 엄청난 사회비용을 투자하고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서야 반쪽으로 전락하는 것이 현실이다. 솔직히 중재기구의 역할 한계론도 문제지만, 중재기구를 얼마나 더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지, ‘한국중재문화의 위기’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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