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여.

간밤에 다시 무서리 하얗게 흰 눈처럼 내렸습니다.

피반령 산자락에서 내려온 ‘서느런’ 기운은 물가 버드나무를 에돌고 길섶 마른풀들을 곱게 단장합니다.

모두가 분칠을 하고 눈사람처럼 서 있습니다.

나는 뽀얗게 맨살을 내놓고 서 있는 저 겨울 적막강산이 좋습니다.

시골 들녘은 지금 적막합니다.

고요한 적막이 아니라 빛깔도 냄새도 자취도 없다는 ‘반야심경’의 공(空)과도 같습니다.

이제 농촌은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습니다. 대통령의 뜻 모를 노여움도 들리지 않고, 반도체 팔아 농군 구한다는 FTA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저 적정심(寂靜心)만 가득 합니다.

오늘 이른 아침 나는 저 서늘한 서릿발 야생의 들길로 한참을 걸었습니다. 연말 업무로 지친 고단한 심신을 달래고자함이었습니다.

흰 그루터기 논을 지나 마을을 두어 개 쯤 지나서였습니다.

한 작은 사찰 앞을 지나는 내 눈에 번쩍 띄는 게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 탄생을 축하 합니다.’

여명의 푸른 산기운을 안고 무늬도 선명하게 연꽃무늬 띠를 두른 작은 흰 천위에는 그렇게 분명히 적혀 있었습니다.

그대여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오늘 희망을 보았습니다.

빈 논 다랑지 끝 작은 산기슭 산문에서 만난 작은 희망이었습니다.

절집 앞에 걸려있는 저 작은 현수막 하나로 인해, 나는 오늘 아침 벌써 상기된 목소리로 몇 군데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며 성탄 인사를 나눴습니다. 사랑과 화해와 배려와 용서와 나눔과 자비와 성령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희망을, 그 희망을 보았습니다.

뭐 절집 앞에 걸려있는 성탄축하 현수막, 성당 앞에 걸려있는 석가탄신 메시지는 사실 어제 오늘의 얘기도 아닐것 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내가 이토록 호들갑을 떠는걸 보면 그동안 우리를 받치고 있는 이세상이 참으로 밋밋했나 봅니다.

그간 우리들 사이에도 생채기와 반목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오늘 내린 저 하이얀 무서리 탓일까요.

푸르른 겨울 ‘산그리메’의 장중한 기운 때문이었을까요.

돌아오는 길, 나는 내 좋아하는 ‘김종길’의 시를 가만히 되뇌어봤습니다.

“…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이제 저문해의 허물은 그저 이렇게 무서리로 덮어 보내고 우리도 이제 우리 혈액 속을 녹아 흐르는 젊은 아버지의 산수유 붉은 알알의 기적을 찾아내야 할 때 입니다.

저 겨울 눈 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알알이 박혀있는 이 땅의 희망을 따내야 할 것 입니다.

그대여 사랑하는 그대여.

그 또한 우리가 해내야 할 우리들의 숙명같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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