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숲에 눈이 내린다.

시멘트 숲에 내리는 눈은 변심한 애인처럼 이내 시들해져 돌아눕는다.

이른 아침 나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방송국 지하주차장으로 건너오면서 순결의 백색 위로 발자국 하나 남기지 못했다.

이 곳 아파트 건설현장에 내리는 눈은 이제 더 이상 눈이 아니다.

지난해까지는 그래도 구룡산 기슭 저 조선소나무숲으로 펄펄 살아 움직이던 그들이었다.
다만 지금은 기착지를 잘못 잡은 멧새 떼처럼 오종종 불안해 이내 소란스러울 뿐이다.

저 풍전등화의 ‘방죽말’이 살고, 이미 자취도 없이 떠난 저 ‘구룡산’ 자락이 살고, 그리고 우리의 ‘원흥이’가 부지했다면 그들도 원래의 모습으로 기꺼이 이 땅으로 너울너울 춤추듯 내려앉았을 것이다.

눈은 저 깊은 산골짜기나 묵은 갈대 서걱거리는 겨울 강변에 가봐야 제격이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사랑과 그리움은 내리는 눈과도 같이 언젠가는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시인 황동규는 저 건강한 골짜기 눈을 통해 사랑으로 채울 수 없는 무엇인가를 기다림으로 승화하겠다는 순백의 숭고한 순정을 ‘즐거운 편지’에 담아냈다.

시인 안도현은 온몸을 던져 사랑을 구원하는 희생의 사랑을 ‘겨울강가에서’ 라는 시를 통해 절절히 노래한다.

“…어린 눈발들이 다른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듯 강은 진실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 찬란한 눈의 태생을 위해 자신의 몸을 얼려 그들을 받아주는 것이다. 그들은 시린 강물이 돼 그렇게 세상을 함께 흐르고 흐를 것이다.

섬진강 변 ‘그 여자네 집’에도 눈이 내렸다.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허리에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김용택의 절창으로 이미 한국인의 가슴에 설레임으로 안착한 우리 모두의 애인이 돼버린 그 여자….

오후로 접어들면서 눈발이 다소 약해지자 나는 시골집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여긴 아직 내리고 있으니께 꼼짝 할 생각 말거라…”

어머니는 여전히 중늙은이 아들의 안위를 염려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시골집으로 갈 것이다.

순백의 피반령 산자락, 내 산골 처소에 당도해 ‘황동규’와 ‘안도현’의 겨울을 맞을 것이다.

섬진강 시린 물소리로 흐르는 ‘김용택’의 첫사랑도 더듬을 것이다. 그때쯤 피반령으로 목화송이 같은 소담한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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