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딜레마’란 말이 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고슴도치들이 서로에게 다가가지만, 다가갈수록 몸에 돋친 가시가 서로의 몸을 찔러 몸엔 상처가 날 뿐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고슴도치는 영어로 ‘가시가 있는 돼지’라는 포큐파인(porcupine)이다. 반면에 딜레마(dilem ma)란 양도논법(兩刀論法)을 말하는데 진퇴양난의 난처한 지경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결국 고슴도치딜레마는 “서로 필요로 하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우리는 가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자신의 허물을 얘기했다가 부메랑이 돼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약혼자에게 혼전 경험을 고백했다가 결혼 후에 이혼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그 뿐 아니다. 양심을 들먹이며 동맹을 강조하던 동업자로부터 어느 날 칼날 같은 공격을 받을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론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들 말한다. 그러면서도 무인도에서 살 수 없기에 다시 그 지독한 사람들과 연을 맺어간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고슴도치딜레마에 빠져 살아야 하는 운명인지 모른다. 그래서 적당히 근거리를 유지하며 살아야 그나마 상처를 덜 받으며 사는 지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고슴도치형 인간은 모두가 같은 유형일까. 그렇지 않다. 오직 자신의 말이 참(眞)이라며 호령하듯 사는 ‘인조용 머리형 고슴도캄도 있고, 늘 자신만 손해 본다며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희생양 고슴도캄도 있다. 그런가 하면 늘 방관자적 입장에서 어느 쪽 의견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은 ‘옵저버형 고슴도캄도 있고, 말끝마다 꼬투리를 잡고 불신하는 ‘불가사리형 고슴도캄도 있다. 의도적인 침묵으로 상대를 주눅들게 하는 ‘달팽이형 고슴도캄가 있는가 하면, 자신은 늘 남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르시스형 고슴도캄도 있다. 이렇듯 고슴도치는 언뜻 보면 그다지 기분 좋은 동물은 아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 어느 종(種)에든 자신이 끼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단지 자신은 그렇지 않은 듯 의도적으로 모른 체 생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서로에게 아픔을 주는 고슴도치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면서도 계속 다가가면서 익힌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서도 추위를 같이 견디기 위한 적당한 거리를 찾아낸 것이다. 우리들은 어떤가. 고슴도치를 만났다고 해서 거리만 유지한다면 스킨십으로 인한 따스함을 잃은 황량한 인생을 살수밖에 없지 않을까. 여기에서 말한 최적의 방법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격려하며 관심을 보여주는 것. 바로 사랑이 아닐까 싶다.

세상의 고슴도치들과 굳이 잘 지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면 고슴도치의 외양을 보지말고 내면을 보면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딱딱하고 무뚝뚝한 사람일수록 내적인 교감이 통하면 더욱 친근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요즘 들어 고슴도치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음미해 볼만하다. 만일 고슴도치가 싫다면 영국 역사가 ‘아이자이야’의 말대로 전략가 ‘여우’로 살아 보라. 단지 하나의 기본원리로 살아가는 고슴도치에 비해 명석한 전략가인 여우로 사는 것이 보다 현명한 방법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여우가 온갖 책략을 다 동원해서 고슴도치를 홀려도 웅크린 고슴도치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여우에게 지략이 있다면 고슴도치에게는 통찰력이 있는 것이다.

‘벌린’의 에세이 ‘고슴도치와 여우’는 여우와 고슴도치의 조화야말로 가장 탁월한 지혜의 교집합이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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