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권력자가 다수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정치학 강의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질문에 학생들은 흔히 경찰력과 군대를 든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경찰력과 같은 공권력은 칼집에 꽂혔을 때 위력을 발하는 것이지, 일단 뽑고 나면 그 위력이 봄 눈 녹듯 사라진다.

‘폭력체감의 법칙’이란 말이 있다. 폭력은 행사하면 행사할수록 그 위력과 두려움이 체감하며, 이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더 위협적인 폭력 수단을 모색할 수 밖에 없고, 이것이 용이하지 않을 때 폭력 주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폭력체감의 법칙’은 우리의 정치사 속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로부터 노태우 정권의 반민주에 이르기까지, 정당성을 잃은 정권은 흔히, 폭력화된 공권력에 그 운명을 의지했고, 그 결과는 예외없
이 몰락으로 귀결되었다. ‘폭력체감의 법칙’이 적용된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폭력화된 경찰력은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언제부터인가 폭력 대신 섬세한 여성 경찰이 치안과 질서를 유도하는 세상이 되었다. 서구의 ‘폴리스 라인’이 ‘립스틱 라인’으로 바뀌어 여성경찰이 시위대를 보호하게된 것이다. ‘이제 살만한 세상이 왔는가’ 싶더니 이것이 왠일인가. 노조원들이 경찰의 발에 짓밟히고 곤봉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다. 광주사태에서 경험하고, 80년대 내내 목격했던 공권력의 폭력화 망령이 21세기 열린 마당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폭력화의 망령이 되살아난데에는 사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강자(强者)가 먼저 자중해야 한다. 강자가 폭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사회 전체가 폭력화한다. 그 보다 무서운 것은 공권력의 위엄이 사라진다는데 있다. ‘스코틀랜드 야드’(런던 경시청)가 무기를 소지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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