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뒹굴뒹굴 늘어지게 누워있는 모습은 난민촌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굼뜬 동작으로 겨우 상반신만 일으키며 웬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꾸물꾸물 일어나 앉았다. “뭘 팔러 왔어?”하여 나를 외판원으로 오인한 것 아닌가 해 “뭘 팔러 온게 아니라…”고 했더니 “다 알어. 다들 그렇게 얘기 해여” 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안녕하세요? 저는 경로당 어르신들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라는 말에는 대꾸도 없이 한손으로 손사래를 하며 무조건 밖으로 나가라고 하며, 눈길은 나머지 한손에 들고 있는 화투장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그래도 들어가 앉으며 얘길 하려하자 한 할머니가 화를 벌컥 내며 “뭘 팔려는지 몰라도 우린 지금 바빠요. 다음에 와요 다음엡”라고 했다. 비로소 수많은 장사들이 갖은 방법으로 할머니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됐고 이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화투(고스톱)와 낮잠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부터 정식으로 주에 3일간 월, 수, 금요일 이곳으로 출근을 할 예정 이예요. 경로당복지지도사가 출근해 여러분들의 건강과 여가를 지도해 줄 것이니 많은 협조 바랍니다”라고 했지만 좋아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렇게 부정적이고 비생산적인 경로당에 경로당복지사가 파견돼 드디어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경로당 관습과의 싸움에서 드디어 우리의 경로당복지지도사가 승리를 한 셈이다. 고치기 힘든 체증처럼 여겼지만 오기가 발동했는지 드디어 해냈다. 여기 그 한 사례로 83세에 동경대에 입학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복지사의 이야기를 통해 소개한다.

‘동경대’란 ‘동네 경로당 대학’의 줄임말로써 나는 동경대의 대학 교수(경로당복지지도사)가 된지 벌써 7개월이다. 동경대의 첫 만남은 실망 그 자체였다. “어디서 공짜로 뭐 준데” 하면서 나를 앞에 두고도 배신하며 떠나는 그녀들을 처음엔 잡지 못했고 떠나지 않는 나의 제자들은 화투 짝 맞추기에 열중하고 있었고, 나의 발령 목적을 이야기해도 도무지 이해도 못하고 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루, 이틀, 그러기를 한 달. 꿈을 안고 동경대에 갔지만 크레파스와 첫인사만 나누고 미술활동이나 이름을 써 보자면 “그 까짓것하면 뭐해” 하면서 뒤돌아 앉았다. 손을 벌벌 떨면서 ㄱ자 쓰려면 삐뚤삐뚤! 자기이름, 전화번호, 동 호수도 모르고 살고 있으면서 “세상 다산 나한테 무얼 기대해! 나는 못해! 나는 못해. 영정사진 찍어놓고 죽을 날만 기다려”라고 했다. 살아야할 이유, 희망, 꿈, 긍정적인 마음은 한 가지도 없는 캄캄한 사각지대에서 가족도, 사회도, 관심도, 기대도 갖지 않는 대부분의 독거생활에서 하루 해가 지루하기만한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두달이 지났을까. 조금씩, 조금씩 변화돼가는 동경대 학생들을 보면서 반복된 학습, 반복된 교육과 작품 활동을 통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 매일 공부하겠다며 옆구리에 책과 연필을 갖고 다니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이거야!” 하며 스스로 감격해 할 때 “오늘은 뭘 할거야요? 선생님!” 하며 재촉하면서 “선상님이 아니면 누가 우리한테 색칠공부, 숫자공부, 한글공부, 맛사지, 노래, 체조, 자원봉사 등을 가르치겠어…”라고 말했다 이렇게 선생님! 선생님! 하며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 늘어서게 된 것이다. 이젠 경로당에 가면 복지사들이 경로당에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워오게 됐다. 동경대 그녀들의 새로운 삶의 모습에서 복지사도 변신하고 있다. 예쁘게 늙는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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