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가 풍년이다.

고구마는 강인한 토종 한국을 닮았다. 땅도 그리 낮 가림을 않는 데다 비교적 풍수해와 가뭄에 잘 견디는 작물이다. 그래서 사나운 올 여름과 가을 가뭄까지 잘 견뎌내며 올해도 튼실한 뿌리를 내 줬다. 산골 내 처소에서는 뿌리내리는 족족 멧돼지 밥이 되는지라 고구마농사는 엄두도 못 내는데 올해도 여기저기서 작고 큰 고구마 상자가 여럿 도착했다. 모두가 일가친척과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 보내 온 것이다. 대개가 일삼아 지은 농사이고 판로도 마땅찮은데다 웬만큼 해야 돈도 안 되는 농사이니 그들은 애써지은 농사를 가까운 이들과 이렇게 함께 나누는 기쁨으로 대신하고자 했을 것이다. 나는 그 답례로 우리집표 귀한 꽃씨를 나누거나 삼삼오오 불러 삼겹살 파티를 열기도 했다.

올해는 가을 가뭄이 들어 대부분 고구마들이 수분이 적은 밤고구마가 많았다. 고구마는 우리들과 참 친숙한 가장 한국다운 작물이다. 이파리에서 줄기 뿌리까지 어디 하나 버릴 때가 없는 데다 아주 훌륭한 영양의 보고여서 그저 쌓아놓고 보기만 해도 저절로 배가 부르고 좋다. 구워먹고 조려먹고 말려먹고 쪄먹고 날로 먹고 튀겨먹고 가루 내어 녹말로 먹고, 먹는 방법도 가지가지인데다 맛은 또한 얼마나 좋던가. 갖은 모양을 한 채 상자에 담겨 내게 온 그들을 보며 나는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이 땅위의 정겨운 모습들을 떠올렸다.

붉은 흙이 있는 그 산비탈 밭이며 그 위를 날고 앉던 온갖 새들과 나비와 벌과 땀송이 맺힌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비바람과 별과 달과 푸른 하늘, 그리고 그 위를 점점이 흐르던 구름들. 잊혀지지 않는 내 기억 속의 고구마는 늘 청천 이모네 집과 오버랩 되며 다가온다. 유난히 이모네를 좋아했던 우리는 늘 방학만 되면 청천행이었는데 60년대 당시만 해도 괴산 청천 땅은 그야말로 문명의 그림자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두메산골 화전의 땅이었다.

당시 이모네는 고구마가 반양식이었다. 겨울방학의 그 긴긴밤 호롱불아래 작은 불꽃을 내며 타들어 가던 화롯불 속의 고구마는 얼마나 뜨겁고 고소했던지. 저녁대신 올라온 갓 쪄낸 큼직한 고구마를 껍질 채 긴 총각김치를 손으로 뜯어 둘둘 얹어 먹던 물고구마는 어찌나 달고 달던지. 고구마는 아침밥사발에도 드문드문 섞여 나왔다. 밥이 섞인 노란 고구마 살은 배추국과 함께 떠먹으면 야릇한 단맛이 돌았다. 그리고 후식처럼 먹던 김칫독에서 퍼 온 살얼음 박힌 동치미국물. 당시 내 기억 속의 이모네 집은 지천이 고구마였다.

광에 보관하고 남은 고구마를 이모부는 사랑방 한 켠에 수수갱이로 발을 엮어 큼직하게 수수갱이 발광을 만들어 시렁까지 닿도록 고구마를 채곡채곡 쌓는 것이다. 그리고는 늘 “고구마는 흠집이 나면 금방 상하느니라. 조심조심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꺼내거라”하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나는 지금도 고구마를 먹을 때마다 늘 그 청천 산골 저녁을 떠올린다.

농사래야 작은 산비탈 밭작물이 전부였던 곤궁했던 그 시절. 토광에 높게 쌓아올린 겨울양식 고구마가 조금씩 조금씩 키를 낮출 때마다 이모부 내외는 속으로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 것도 모른 채 눈치 없는 철부지 우리들은 방학이 되자마자 그 곳에 몰려가 방학이 끝나도록 천방지축으로 뛰놀며 귀한 양식을 축냈다. 지금 이모부 내외는 내 집 가까운 곳에 누워 계신다. 볕이 좋은 날 고구마라도 몇 개 삶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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