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민 연변대 총장 충북대 세미나서 주장

1906년 이상설 선생, 정순만 선생(일명 왕창동·王昌東) 등이 간도에 세운 ‘서전서숙(瑞甸書塾)’이 오늘날 중국조선민족이 중국 내 선진적인 문화민족으로 당당히 설  수 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이 대학 교육개발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보재 이상설과 근대교육’ 세미나에서 중국 연변대학교 김병민 총장(사진)은 ‘서전서숙-중국조선민족근대교육의 불씨’ 연구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김 총장의 연구에 따르면 1860년대에 해마다 연속된 홍수와 가뭄 등의 자연재해로 한반도에는 극도의 기근현상이 벌어져 청나라의 내륙주민 만주이주를 금지하는 봉금령에도 조선인들의 두만강을 통한 월경이 일어났다.

때마침 영국,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위협에 직면해 있던 청왕조는 재정수입 확대와 개발을 통한 국경지역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봉금령을 폐지하고 조선인들의 중국 동북지역 이주를 허용했다.

청왕조는 1885년 두만강 북안 700리, 너비 40∼50리 구간, 즉, 두만강 이북 해란강 이남지역을 조선인들의 전문개간지역으로 확정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1920∼30년대 일본의 대륙침략정책의 수요에 따라 일제는 조선인들을 동북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그동안 산발적이고 소규모 형태의 이주가 집단적이고 대규모 형태로 바뀌어 이주민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1945년 광복 전 200만명을 훨씬 웃돌았다.

간도(현재의 연변) 지역의 핵심지인 용정(龍井)의 1926년 말 조선 이주민 수는 2천334가구에 1만1378명이었다.

안정된 이주민 집단이 형성되면서 이들의 교육적·문화적 수요가 대두됐고 간도와 같이 조선이주민이 집중된 지역에서 전통 서당과 개량식 서당과 같은 교육기구들이 산발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했다.

또 이주민의 증가로 조선이주민의 신분구조가 초기 절대다수의 농민에서 지식인, 상인 등으로 다양화됐고 특히 일제의 탄압을 피해 반일구국운동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중국으로 이동해 체계화된 이주민사회로 발전했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는 민족교육운동이 있었는데 서전서숙을 시작으로 서당식 교육이 아닌 근대교육이 본격적으로 조선이주민 사회에 자리를 잡게 됐다.

동시에 동북3성의 첫 조선인 사립근대학교인 서전서숙처럼 조선이주민들의 근대학교는 근대지식의 전수와 함께 반일·민족주의 사상의 전파와 애국자의 양성을 주요과제로 삼았다.
이런 이유로 일본 통감부의 간섭과 압력에 서전서숙은 결국 설립된 지 8개월만에 문을 닫았다.

그러나 서전서숙에 모였던 학생들은 간도의 각 지방에 흩어져 모교의 건학전통을 계승,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07년 연길시 와룡동의 창동학교, 연실시 소영자의 광성학교, 화룡현 대립자 명동촌의 사립 명동학교, 화룡현 광개사 후저동의 정동학교 등이 서전서숙 학생들이 세운 학교다.

간도에 조선인이 세운 사립학교는 1911년 8개에서 1913년 46개, 1917년 50개 등으로 급격히 늘었다.

김 총장은 “서전서숙의 뒤를 이어 1910년대 고조됐던 사립학교 추진운동은 중국 내 조선민족사회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며 “이는 문화교육역량을 강화시키는데 기초가 됐다”고 평가했다.

또 서전서숙으로 대표되는 이주 초기 교육문화운동은 오늘날 조선민족교육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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